사랑과 평화.

[사랑과 평화] 기타-최이철, 베이스-이남이, 키보드-김명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음악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던지 음계가 없는 우주 같은 음악이 나올 수 도 있다”
최규성 : 우선 근황이 궁금하고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된 소감도 듣고 싶다.
최이철 : 크고 작은 무대에서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 금년 신학기부터는 명지대에서 실용음악 강의를
시작했고 지난 3월 5일부터 새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듣기 편하고 리듬감 있는 연주위주의
펑키재즈곡이다. 작업은 한 2년 쯤 걸릴 것 같다. 꽤 오래전에 발표된 100대 명반 순위는 알았는데
이번에 선정한 명반순위는 모르고 있었다. 지난번엔 50위였는데 12위로 올랐다니 영광이다.
1집은 고생이 자심했던 음반이라 순위에 대해서는 조금 아쉽다.
그런데 신중현선생의 순위가 궁금하다.
최규성 :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은 7위에 올랐다. 1위는 들국화 1집이다.
최이철 : 들국화의 1위 선정 축하한다. 사실 들국화가 정식 결성되기 전에 전인권이 찾아와 같이
음악을 해자고 했었다. 팀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2003년에 콘서트를 같이했었다.
나는 국내 최고 뮤지션은 신중현 선생이라 생각한다. 옛날 음악하기 위해 집을 나와 자취생활을 할 때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틀어 음악을 들었다. 그때 우연히 흘러나오는 신중현의 음악을
듣고 “국내에도 이런 음악이 있는가” 깜짝 놀랐다.
음악을 처음으로 함께 한 건 21살 때 신상옥 감독의 ‘김 선생과 어머니’ 영화음악 녹음을 통해서다.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빅밴드 녹음이었는데 난 세컨드 기타를 연주했다.
2채널 동시녹음이라 한사람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했던 때다.
그런데 내가 너무 얼어서 실수를 많이 했었다(웃음). 그 후 여러 번 동이 틀 때까지 밤새워 술 마시며
그분의 음악 열정을 배웠다.
최규성 : 사랑과 평화는 미8군 오디션 역사상 최고 등급인 Special AA를 받은 유일한 국내밴드로
알려져 있다. 8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보자.
최이철 : 미8군 무대에 서려면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그때 ‘따블A’를 받으면 최고였다.
우리 멤버 5명은 돈 욕심이 없었다. 출연료로 몇 천불을 받으면 숙소에 두고 각자 쓰고 싶은 데로
가져다 썼다. 다 총각들이라 한 집에 같이 살았다. 하루에 스테이지를 여덟 개나 도는 강행군에도
연습은 빼먹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이불 덮어쓰고 연습을 했다. 멤버들이 학구적이라 별도로
정식 음악공부도 하러 다녔다.
최규성 : 사랑과 평화는 갑자기 탄생된 밴드가 아니다. 사랑과 평화 이전에 거쳐 온 자신의
음악인생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최이철 : 미8군에서 음악을 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10대 시절에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8군 무대에
섰다. 그땐 음악이 뭔지도 몰랐다. 지금은 변했지만 옛날엔 트로트나 포크송을 싫어했던 특이한
아이였다. 요즘 들어보니 좀 민망하지만 당시 ‘아이들’ 음반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음반이었다.
첫 무대는 1시간 패키지 쇼인 ‘데니스 쇼’였다. 그러다 ‘박활란 쇼’의 백 밴드로 활동했다.
일반무대 활동을 할 때 을지로 태평양다방에 출연하던 김명곤과 처음 만났다.
우린 그 옆에 있던 신다방에 출연했었다. 그러다 1971년 김대환과 솔로 데뷔전의 조용필과 3인조 밴드
‘김트리오’를 잠깐 했고 오승근의 5인조 밴드 ‘영 에이스’를 거쳤다. ‘서울나그네’는 1973년에
대구백화점 옆 ‘이브’란 클럽에서 김명곤을 다시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김명곤은 ‘투 에이스’를
했던 홍순백팀에서 건반을 했다.
그러다 드럼 김태홍, 베이스 김태옥과 4인조를 결성해 8군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후 이남이,
이철호가 가세했다. 멤버들은 음감이 뛰어나 레퍼토리 중 80%는 연습 없이 바로 편곡해 녹음했다.
영화 007음악도 장난삼아 즉흥으로 연주했다.
최규성 : 70년대 유명DJ이자 포크가수 이장희와의 만남은 중요하다. 그로 인해 ‘사랑과 평화’로
거듭났고 불후의 명반 사랑과 평화 1집을 발표했다.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최이철 : 1976년쯤 명동 로얄호텔에 나갈 때다. 동아방송 밤 프로를 진행하던 이장희 형은 통행증이
있어 방송 후 오토바이를 타고 클럽에 거의 매일 왔다. 처음 콧수염 난 사람이 술 시켜놓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우리 음악을 들었는데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나를 불러 의외의 말을 했다.
“너희 밴드가 스타가 되는 걸 보고 싶다. 녹음 한번 할까” 장난삼아 ‘그러자’ 했는데 1년 후 퇴계로
무겐 나이트에 출연할 때인데 술에 취해 있는 내게 ‘한동안 뜸 했었지’라는 곡을 들고 다시 나타나
진짜 “녹음을 하자”고 했다. 히트곡이 되었지만 난 그 곡이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아 녹음에서
빼자고 했다. 그런데 장희형이 “딴 거는 다 너 말 듣겠는데 그 노래는 꼭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규성 : 이장희가 팀명을 작명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맞는가?
최이철 : 아니다. 잘못 알려진 거다. 음반 내기 전에 팀 이름은 외국이름으로 하지 말고 좋은
우리말로 짓자고 했다. 그때 나왔던 이름이 ‘홍길동’, ‘일지매’였다(웃음). ‘사랑과 평화’는
이남이씨가 제안했다. 처음엔 ‘전쟁과 평화’ 이미지가 떠올라 이상했다. 하지만 예전에 우드스탁
같은 곳에 50만 명이 모였어도 사고 없이 평화로웠던 문화가 있었기에 우리도 싸움 없는
‘사랑과 평화’란 이름이 차츰 좋게 느껴졌다. 정말 초창기엔 돈 가지고 싸우지 않고 그렇게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며 살았는데…
최규성 : 앨범의 곡 준비에서부터 어떤 과정을 통해 녹음이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최이철 : 녹음은 1978년 초부터 이촌동 한강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대부분 곡은 엄청 더운
8월에 했다. 마지막 녹음 곡 ‘어머님의 자장가’ 때는 너무 더워서 멤버들이 웃통을 다 벗고
연주를 했다. 엔지니어들에게는 그런 광경도 특이한데 그동안 쭉 해왔던 음악이 아닌 좀 특이한
음악을 하니까 우릴 ‘약간 이상한 놈들’로 보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동시녹음 시절이라 엔지니어랑
많이 싸웠다. 1집 때는 2채널 녹음이었고 2집은 16채널 녹음이었다.
최규성 : 이태리 뮤지션인 베이스 연주자 사르보의 참여도 흥미롭다.
최이철 : 바로 잡을 것이 있다. 1집을 보면 베이스 연주자가 이태리인 사르보로 기록되었는데
그는 실제로 활동만 같이 했다. 이남이씨가 녹음작업을 다 해놓고 신상에 문제가 생겨 급히 영입한
사르보로 음반에는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최규성 : 가만.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럼 사르보는 어떻게 영입했나?
최이철 : 사르보는 송창식 선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하루는 창식형과 장희형이 함께
업소에 왔다. 베이스가 없어져 급했던 차에 송창식 백밴드로 온 사르보를 우리 팀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송창식 형이 “그래 나보다 너하고 어울린다”고 허락해서 멤버로 영입할 수 있었다.
당시 사르보는 베이스를 정말 잘 쳤다. 그가 연주를 하면 다른 밴드들이 다 구경 왔을 정도였다.
그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실력 좋은 이탈리아 밴드가 있었다.
로마노 밴드(후에 나미와 함께 활동)다. 사르보는 그들보다 실력이 뛰어났다.
원래 피아노 치던 뮤지션인데 이 사람을 통해 베이스를 때려서 연주하는 ‘초파주법’을 국내 밴드들이
배웠다. 정말 음악가지고 사르보와 싸움도 많이 했지만 실력이 대단해 우리 레퍼토리를 다 3일 만에
마스터한 사람이다.
최규성 : 1집 수록곡은 김이환, 김명곤, 최이철 3명의 작품이다. 여기서 김이환은 이장희의
다른 가명이라는데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왜 가명으로 곡을 발표했는지 궁금하다.
최이철 : 사실이다. 이장희곡이다. 당시 대마법에 걸리면 3년 동안 활동을 못했다.
그래서 타인의 이름으로 곡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김이환은 이장희의 의류사업을 도와주던 사람이다.
이원호 이름으로 발표된 곡도 있는데 장희형 아들 이름이다.
2집의 이경희란 이름으로 발표된 곡도 다 이장희곡이다.
최규성 : 1집 앨범을 보면 앞면은 김명곤 뒷면은 당신 편곡으로 되어있는데 앞뒷면으로 편곡한 곡을
구분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최이철 : 그건 재킷을 만드는 인쇄과정에서 잘못 표기된 것이다.
뒷면 곡들은 내가 편곡한 것이 맞고 앞면에 있는 ‘한동안 뜸 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도 내가
편곡을 했다. 저작권협회에는 내 편곡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졌으면 좋겠다.
최규성 : 1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무엇인가?
최이철 : ‘달빛’이다. 그냥 대중가요 반주가 아니라 테마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연주한 곡이다.
녹음을 들어보면 너무 키를 높게 잡아 내 목소리가 하이로 많이 올라갔다. ‘한동안 뜸 했었지’도
노래보다 연주에 신경을 써 녹음을 했다. ‘저 바람’도 연주 위주다.
최규성 : 1집 수록곡을 보면 무려 4곡이 연주다. 곡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베토벤의 ‘운명’이나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처럼 클래식을 록에 접목하는 실험적 욕구 때문인가?
최이철 : 곡이 부족해서 연주음악을 많이 녹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평범한 대중가요보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연주곡들을 많이 시도해 보고 싶었다. 지금은 크로스오버가 각광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저것들이 클래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명곡을 망친다”는 따가운 눈초리가 분명 있었다.
그래서 음반 발표 후 욕을 많이 먹었다. “이게 무슨 음악이냐!” 뭐 그런 반응. 이런 일도 있었다.
1집 내고 2집으로 넘어갈 때 의상디자이너인 내 작은어머니가 우리 멤버들에게 인디언 복장의 독특한
의상을 만들어 주었다. ‘가요탑10’ 프로에서 3주간 연속 1위를 할 때 그 인디언 띠를 주렁주렁 달고
출연했는데 그걸 보고 오해한 기자가 일간지 1면에 “남자들이 귀거리를 했다”고 기사를 실어 팀이
해체될 뻔 했다(웃음).
그래서 악기 싸가지고 용인의 이장희씨 옛날 집으로 도망가 숨어 지냈다. 그때 2집 곡들을 다 만들었다.
최규성 : 자신의 노래가 세상에 메아리 칠 때 짜릿함을 느꼈을 것 같은데? 당시 음반은 얼마나
팔려나갔고 생소한 흑인 펑키음악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는가?
최이철 : 당시 광화문 레코드 가게에서 우리들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우리 음악은 학생층과 젊은 층에서 좋아했다. 경기여고 2학년 아이들이 급훈을 ‘사랑과 평화’로
정했다고 들었다. 그때 TBC 7대가수상, MBC 10대가수상 중창단 상, KBS에서는 10대가수상을 78년
79년 2년 연속 받았다. 당시 인기가 많아 거의 매일 TV출연을 했다. 어느 날 사르보가 미도파
백화점에 남성용 스킨을 사러갔는데 여자점원이 알아본 모양이다. 털 많은 손으로 돈을 주려고 하니
그냥 가라고 해 영문도 모른 그는 기분이 좋아 엄청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사람들이 우리 노래를 좋아하고 상 받을 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시상식 때 인기가수들 틈에 어울리지 않는 밴드 멤버들이 껴 있는 모양새가 이상했고
분위기도 어색했다.
최규성 : 자신이 참여한 사랑과 평화 음반 중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앨범은?
최이철 : 개인적으로 1집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앨범은 3집이다.
나는 항상 음반을 내놓고 후회를 한다. 왜 그때 이렇게 밖에 음악을 못했을까.
1집은 대중음악에 대한 개념도 없이 녹음을 했다. 그저 펑키라는 리듬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뜸 했어지’라는 곡에 접목을 해 본거다. 헌데 그 곡이 잠도 못 자게 피곤하게 만들 줄
정말 몰랐다. 밤업소 일을 새벽 4시까지 하고 집에 들어가 자다보면 매니저가 깨워 방송에 나갔다.
방송국에선 히트곡만 부르게 해 피곤했다. 그래서 멤버들에게 “우리 인기고 뭐고 다시 음악 하러
옛날로 돌아가자”고 했다가 “너 미쳤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웃음). 난 지금도 ‘어머님의 자장가’,
‘베토벤의 운명’이 더 좋다. 3집은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여러 생각을 쓴 앨범이다.
그때 처음 부른 ‘겨울바다’는 부산 해운대 여행 때 느낌을 쓴 곡이다. 김현식이 죽기 이틀 전에
리메이크했는데 나보다 더 애절하게 잘 불렀다. 나는 여행 중에는 곡을 못 쓴다.
좋은 가사가 있으면 외워서 집에 돌아와 곡을 붙이는 스타일이다.
작곡을 하려면 약간의 활력소가 필요하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남이 연주하는 것을
듣다보면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한다.
최규성 : 1978년 발표된 사랑과 평화 1집은 빛나는 음악업적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은 그렇다 치고
들국화, 산울림에 비해서도 과소평가되어 있는 느낌인데.
최이철 :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리듬이라 생각한다. 리듬이 깨지면 그 음악은 거기에서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처음 시작해서 끝까지 가야하는데 2집까지 ‘장미’로 승승장구했지만 1980년대
들어 사고가 있어 얼마간 활동을 못했다. 대중은 금방 눈앞에 나서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는 것 같다.
공백기를 이겨내고 1987년 3집 ‘울고 싶어라’로 활동을 이었지만 공백 없이 계속 활동을 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음악적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아쉬운 생각이 든다.
요즘 유행하는 힙합, R&B, 맥이 빠졌지만 ‘소몰이 창법’ 모두 흑인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펑키(funky)는 재즈, 록, 소울, R&B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에 성립된 미국 흑인 댄스음악이다.
그래서 흑인적인 감각이 풍부한 리듬이나 연주. 흑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음악을 통칭해 ‘훵키’
혹은 ‘펑키’ 라 통칭한다.
최규성 : 사랑과 평화의 음악은 ‘펑키하다’고 단정 지어진다. ‘펑키’에 대해 소개해 달라.
최이철 : 우리가 펑키음악을 연주한 미8군 클럽에는 늘 흑인들로 꽉 찼다. 그때 친했던 흑인병사
내무반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음악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왔냐’는 인사에도 리듬감이 있었다.
가끔 TV에서 원시 부족을 다룬 다큐를 본다. 우리도 명절이 있듯이 그 사람들도 명절 때 춤추고
노는데 아이들까지도 리듬감이 굉장하다. 이렇게 리듬 자체가 몸이 배어있는 흑인들에게 악기를 주니
얼마나 잘하겠는가. 예전에 김덕수 사물놀이 팀과 공연했을 때 신명나는 우리의 ‘덩더쿵’ 리듬을
경험하고 놀랐던 기억도 난다.
펑키 리듬자체는 뭐라고 딱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을 약간 흥분하게 만드는 리듬인 것 같다.
벤쳐스, 비틀스 이후에 소울 뮤직이 나왔고 펑키는 70년대를 지나면서 디스코 음악으로 절정을 이뤘다.
70년대에 미국 사람들은 펑키음악을 하면서 랩을 잠깐잠깐 넣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랩을 했었다.
지금은 연주를 하지 않고 컴퓨터로 하는데 시대의 흐름이라 본다. 그런데 말하는 것도 좋지만 음악은
음악이니까 멜로디가 있고 가창력이 있는 노래로 했으면 좋겠다.
최규성 :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뮤지션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최이철 : 너무도 많다. 10대 때 AFKN에서 웨스 몽고메리, 칙 코리아의 음악을 듣고 처음으로
흑인 펑키리듬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음악을 제대로 배워야 겠다”는 마음에 신중현 선생의
음악스승인 이화여대 이교숙 교수에게 정식으로 화성학을 배우고 이판근 선생에게 재즈의
기본을 배웠다. 당시 인기 높던 제임스 브라운은 펑키의 창시자 같다. 제임스 브라운 이전에
윌슨 피켓도 소울을 잘 연주했고 레드 제플린, 지미 헨드릭스도 소울 뮤직을 연주했었다.
그들의 스테이지 매너나 노래는 그냥 몸에서 우러나오는지라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
흑인음악 쪽에선 한 획을 그은 마일즈 데이비스는 화성학으로 볼 때 ‘빵’ 질러놓고 해결하는 식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이쪽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딴소리를 낸다.
그게 기막히게 조화가 된다. 한국계라고 하는 칙 코리아의 [리턴 투 포에버]도 명반이다.
이 사람 앨범은 나왔다하면 샀었다. 코모도스, 올 맨 브라더스의 음악을 들었을 때도
“이게 음악이구나” 생각했다.
최규성 : 혹 알려지지 않은 선배 국내 흑인음악 뮤지션이 있는가?
최이철 : 1980년대 초반 부산 서면 로터리에 있는 반도호텔에 불이나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때 김세혁이란 분도 돌아가셨는데 1968년쯤 8군에서 그 분이 리더로 있던 5인조 밴드의 공연을 봤다.
당시 10대 시절이라 음악을 잘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 음악이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오티스 레딩 같은 흑인음악이었다. 그 팀은 음반도 기록도 없지만 흑인음악을 연주한 국내 최초의
밴드가 아닌가 싶다.
1960년대에 박광수, 박인수 선배도 미8군에서 국내가수로는 처음으로 블루스나 소울을 불렀다.
두 사람의 필과 가창력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박광수 선배는 지금도 블루스를 계속 고집하는 분이다.
박인수 선배는 어렸을 때 미국 할렘가에서 자라면서 흑인의 리듬과 한의 정서가 몸에 밴 것 같다.
최규성 : 국내 흑인음악의 현주소와 후배 뮤지션들에 대한 느낌은?
최이철 : 상품화가 주력인 매스컴 쪽에서는 흑인음악이 퇴보했지만 작품을 중시하는 언더계열에선
꾸준하다고 본다. 예전에도 그룹들은 많았지만 흑인음악 전문 밴드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한 두곡 섞어서 하는 정도였다. 요즘 활동하는 젊은 후배들의 노래도 매일 듣는다.
이거 잘못 이야기하면 욕먹는데… 지금의 R&B는 너무 기교위주로 현대적으로 바뀐 것 같다.
정박자에서 늦게 떨어지는 느낌이다. 기교도 훈련이 아니라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진정한
R&B라고 생각
최규성 : 벌써 40년 음악인생이다. 앞으로 어떤 음악을 계속해 나갈 것인가?
최이철 : 모르겠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음악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벗어난 음악으로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는 음계가 없는 우주 같은 음악이 나올 수 도 있다.
모든 게 너무 무섭게 발전하니 내 음악도 어떻게 진보할지 나도 궁금하다.
그런데 90년 제1회 환태평양음악제 때 각 국 밴드가 다 똑같은 음악을 하는 걸 보고 이건 아니라고
느꼈다. 차라리 우리나라 트로트를 특색 있게 편곡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특이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 월드뮤직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음악적 깊이에 있어서는 그만인데 작업이 쉽지 않다. 각국의 민속 악기를 연습하고 앨범 만드는데
5년이 걸렸다. 그게 얼마 전에 발표한 [유라시아의 아침]이다. 김명곤과는 매일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며 약속한 것이 있다.
자기는 거문고를 배우고 나는 아쟁을 배워 남의 곡 카피가 아닌 진짜 우리 곡을 만들어보자고.
그런데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 아쉽다. 한국 중국 일본 민속음악은 비슷한 것 같다.
그걸 어떻게 현대적으로 표현하고 접목하는가를 요즘 고심하고 있다.
내 생각엔 자기 음악, 독창적인 색깔이 있는 음악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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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raytaker 켬 4월 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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